신뢰의 위기
재개발 재건축 시장이 의외로 많이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1.11대책 이후 분양가 상한제 등 각종 규제로 타격이 불가피한데도 호가 하락세가 두드러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대책이 비수기와 맞물리면서 호가 하락을 부추길 것이란 당초 예상과 다른 것 같습니다. 일단 구정 때까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긴 합니다만...
오늘 시장동향을 살펴보면서, '신뢰의 위기가 이만큼 심각한가'란 생각을 했습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주로 중개업자, 부동산 전문가, 주택 대기거래자 등입니다만)이 갖고 있는 생각 중 하나는 "기다리자"인 것 같습니다. 올해만 버티면 정책이 바뀔 것이란 믿음입니다.
예컨대 양도세(2주택자 50%, 3주택자 60% 등) 종부세(과표 올해 기준가격의 80%) 등의 완화를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다주택자들은 양도세 많이 내고 올해 파느니, 종부세 좀더 내고 기다리다가 추후 양도세가 완화되면 그때 팔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기존주택 매물을 유도하겠다는 정부 정책이 먹혀들 리 없습니다.
정부는 실수요자들이 기다리면 싼값에 아파트를 제공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장에선 '반값아파트'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또 많은 무주택자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 만큼 충분한 공급이 이뤄질 지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합니다. 각종 규제로 신규공급의 숨통을 꽁꽁 묶어놓고,공급을 많이 하겠다면 말하면 잘 믿으려 하지 않겠지요.
시장에선 이 때문에 2-3년 후의 공급부족을 앞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신뢰의 상실'은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란 지적을 피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게 청약제도 개편입니다. 정부는 당초 내년부터 공공택지 내 중소형 평형에 대해, 2010년부터 민간택지 내 중소형 평형에 대해 청약가점제를 도입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습니다.
때문에 작년 청약부금이나 중소형 청약예금 가입자들이 중대형 청약예금으로 갈아타려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지요. 주로 평형을 넓혀가려는 1주택자나 신혼부부, 독신가구, 이혼가구, 부양가족이 적은 가구 등이었습니다. 청약가점제가 도입될 경우 당첨가능성이 거의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중대형 평형(특히 민간택지)의 경우 가점제가 도입되지 않기 때문에 나름대로 '틈새'로 여겼던 겁니다.
하지만 1.11대책 내용은 정부의 당초 '약속'과 달랐습니다. 청약가점제를 오는 9월부터, 또 공공 민간 할 것 없이 전 평형에 도입하겠다는 것입니다. 작년 말 정부 말만 믿고 청약통장을 리모델링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스스로 했던 약속을 저버린 꼴입니다.
정부가 공공 민간부문 모두 규제 일변도의 정책을 펴면서, 타깃도 불분명해졌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무주택 서민을 위한 정책인지, 중산층을 위한 정책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겁니다.
연말께 분양될 판교 주상복합 아파트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주상복합은 최소 40평형 이상으로 구성된 1266가구짜리 대단지입니다. 주력 평형은 50-60평형입니다. 부동산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있어도, 이 이상의 노른자위 아파트가 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 겁니다.
여기에도 분양가 상한제와 채권입찰제(주변 시세의 80%선이 상한)가 적용됩니다. 분양가 상한제와 채권입찰제가 동시 적용될 경우, 분양가는 평당 2000만원 정도로 예상됩니다. 주변 시세보다 훨씬 싸지요.
문제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가격을 낮춘 아파트를 과연 서민들이 살 수 있느냐는 겁니다. 50평형 1채만 해도 10억원입니다. DTI(총부채상환비율)가 적용되기 때문에 계약 때 대출을 많이 끌어쓸 수도 없습니다. 쉽게 말해 '부유층'이 아니라면 이 아파트 매입은 꿈도 꾸기 어렵습니다. 부자들만의 잔치가 되는 셈이지요. 당첨된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훨씬 더 큰 이익을 보는 구조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정부는 서민 뿐만 아니라 부유층 역시 '보호대상'에 포함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한경 조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