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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가지고서도 지속적인 혁신에 실패하는 것은 기업 내부에 뿌리 박힌 관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업의 변화를 방해하는 관성의 진원지는 어디인지 그리고 어떻게 효과적으로 공략할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혁신의 적, 관성
기업에 있어 실패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컨대 신사업에 관한 한 연구에 따르면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90%까지 기업이 추진하는 신사업은 실패한다고 한다. 아이디어 단계부터 보자면 삼천 가지의 신제품 아이디어 중에 오직 하나 정도가 시장에서 성공한다는 결과가 있을 정도다.
글로벌 기업이라 해서 실패가 비켜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끊임없는 혁신 활동을 추구하지만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실패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도전해서 실패하는 것과 실패의 기억에 사로잡혀 도전을 주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은 아무리 자금력이 좋고, 인재가 많은 회사라 하더라도 어느 순간 시장에서 도태되기 때문이다. 실패로 인해 투자자금을 잃는 것은 차라리 작은 문제다. 임직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기업 내부에 냉소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며, 미래에 도래할 변화에 저항하는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실패는 기업 역량을 좀먹는 덫이 될 수 있다.
흔히 성장이 정체되고 활력을 잃은 기업을 진단할 때 기업 내부의 혁신 프로세스, 또는 기업문화(Cultural infrastructure)를 이야기한다. 리더쉽의 부재, 적합하지 못한 조직구조,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및 비효율성, 권한이양(Empower-ment)의 부족, 잘못된 지식 관리(Knowledge Management)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흔히 지적되는 문제점들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고치려는 것은 식욕 부진을 보이는 암환자에게 소화제를 처방해 주는 것과 같다.
기업 문화나 조직 시스템 뒤에 도사린 근본적인 원인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더쉽의 부재보다, 잘못된 조직 구조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기업 내부에 존재하는 변화 거부증, 즉 관성(Inertia)이다. 관성의 늪에 빠진 기업들은 자기도 모르게 기존의 사업방식이 옳다고 믿어버리고, 사업 환경이 안 좋아지면 기존 사업방식의 근본적인 원인은 덮어놓은 채, 눈에 보이는 작은 비효율들만 고치려 애를 쓴다.
대기업은 체질적으로 비만 유전자가 있다
관성이란 정지하고 있던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 하고, 운동을 하는 물체는 계속해서 운동을 하려는 성질을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물체는 관성을 갖는다. 다만 물체의 질량에 따라 관성도 다르다. 물체의 질량(물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양)이 크면 클수록 관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업 규모에 따라 조직 관성의 정도도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벤처기업들은 경쟁자보다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새로운 전략을 잘 받아들이지만,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체계적인 시스템과 오랜 기간의 사업 경험을 축적하게 되면 기업 밖에 존재하는 시장과 고객보다는 과거의 경험, 조직에 널리 퍼진 관습들을 더 중요하고 익숙하게 여기게 된다.
소니(Sony)의 사례를 살펴보자.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이라고 하는 게임기 사업을 대성공으로 이끌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단순한 그래픽 처리기에 불과하던 기존의 2D 게임기에 컴퓨터 프로세서를 붙인 형식으로 고화질, 고기능의 기술 차별화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성공 체험은 소니의 이후 사업 전략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최근의 차세대 DVD 표준 경쟁에도 소니는 고화질, 고기능을 강조하는 동일한 전략으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소니는 헐리우드의 컨텐츠 제공 업체들과 독점 계약을 맺고, LG, 삼성 등의 우군을 계속 확보하면서 블루레이 디스크(Blue-ray Disc)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과거의 영화에 견줄만한 성과는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설사 경쟁표준인 HD DVD를 누르고 표준으로 채택된다고 하더라도, 디스크 기반의 저장매체 중심이던 컨텐츠 사업이 네트워크 통신기술 발달과 저장기기(HDD/메모리) 가격의 급격한 하락으로 인해 직접 전송이나 디지털 파일 저장 형태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블루레이 디스크는 경쟁 기술인 HD-DVD에 비해 기능도 좋고 빠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제는 이런 식의 기술 드라이브가 이젠 더 이상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고객의 입장에서 느끼는 성능 차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의 성공 체험에 빠져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차별화하기 어려운 성숙기 사업에 과잉 투자를 해 오버슈팅에 이르는 전형적 사례가 될 가능성도 있다.
관성의 진원지는 성숙기의 주력사업
그렇다면 대기업의 관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관성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얻은 경험일수록 사람들은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보통 이러한 경험은 사업 초기에 성공을 가져다 주지만 사업 환경이 변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히려 변화를 가로막는 장막이 될 수 있다.
대기업의 관성의 진원지는 오랜 시간 동안 성공을 거두었고, 그만큼 많은 경영진을 배출한 성숙기의 주력 사업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유형의 주력 사업들이 기업의 매출액 및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경영자들은 각별히 관성에 유의해야 한다.
도입 초기에 혁신적이었던 제품들도 시장이 성숙해 감에 따라 점차 범용화된다. 그러나 경영자들은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일 뿐,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인력, 자금과 같은 경영 자원들을 과거의 주력 사업에 집중 투입한다. 이러한 자원의 집중이 ‘관성’을 양산하는 주범이다.
성숙기 사업은 제품 속성상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상승 가능성 (Upside Potential: 차별화를 통한 시장 창출 및 확대)보다는 하락 위험(Downside Risk: 품질, 납기, 생산성 등의 기본적인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을 경우 발생하는 기회 손실)이 더 큰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사업이나 업무에 종사하는 관리자들의 위험 회피 성향은 점점 높아지며, 업무 프로세스도 점차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할 수 없는 구조로 변화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도전적인(Risk Taking) 관리자들보다는 위험 회피 성향의 관리자들의 수가 많아지므로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조직역량이 쇠퇴하게 되는 것이다.
관성을 양산하는 자원 배치 메커니즘이 문제
대부분의 기업들은 <그림 1>에서 보듯, 단기적으로 중요하되 경쟁사 대비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는 사업영역에 핵심 자원들이 묶어놓곤 한다. 이러한 사업들은 대부분 규모가 크고, 경영자의 성과 평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 부분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재고관리, 금융거래, 제품선적/판매 시스템, 회계기준, 고용계약, IT시스템 등의 보완이 순차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문제는 이처럼 증상 개선을 통해 나타난 결과를 핵심 경쟁력(Core Competency) 강화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오히려 위험회피적인 기업문화를 양산하게 되고 조직의 위기 의식을 떨어뜨린다.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이라는 근원적인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두꺼운 붕대로 감아놓기만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상처는 붕대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데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는 I과 II의 사업영역에 투입할 자원이 부족해지고, 기업의 미래 경쟁력은 점차 약화된다. 신사업이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지 못하거나 산업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사업 모델의 혁신이 지연되는 것은 이러한 메커니즘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매출규모와 이익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궁극적으로 관성을 고착화하고 양산해 나갈 수 밖에 없다. 이 영역의 제품들은 점차 고객입장에서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게 되고 오버슈팅하게 된다. 대부분 성숙기의 주력사업들은 경쟁사 대비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공격 당할 개연성이 있고 이 부분에만 집중할 경우 오히려 중장기적으로 매출이 줄어들 것이라는 위기 의식이 필요하다.
혁신의 흐름에 따른 자원재배치 프로세스
그렇다면 성숙 사업을 보유한 대기업들이 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혁신의 흐름에 따라 자원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는 혁신사업들에 항상 일정 정도의 안정된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이후 중점 육성 사업으로 선정되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기 위해 대량의 자원을 투입하되, 이후 성숙기의 주력사업으로 성장해 가면서 본격적으로 내부 합리화 프로세스를 거쳐 자원을 추출해 차별화 사업 쪽으로 재배치하면서 관성을 줄여 나가야 한다. 즉 자원(인력, 자금)의 이동이 비차별화 사업 및 프로세스로부터 차별화 사업 및 프로세스로 끊임없이 유연하게 일어날 때 혁신적인 문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영자들은 성숙기 사업영역에 묶여있는 자원들을 추출해 내기 위한 내부 프로세스를 개발해야 한다. 물론 기업 고유의 전략과 문화, 사업의 특성을 고려하여 단계별로 추진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이 적절하다. 예컨대, 당분간 사업의 외형을 유지시킬 만큼 성장한 중점육성 사업들이 없다면, 외형과 수익은 우선 유지하되 점차 체중을 줄여가는 자원 재배치 프로세스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무어(Moore)가 제시한 다섯 단계 모델(Five-Levers Model)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중앙집권화(Centralize) 단계
자원의 합리화 작업은 사업부 단위에서는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가 없다. 사업부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사업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일단 해당 사업이 차별화 단계를 넘어섰다는 판단이 서면 의사결정 구조를 중앙으로 집중화하는 프로세스를 통해서 이 부분에 묶여있는 관리비용(Overhead)과 인원들의 일부분을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2. 표준화(Standardize) 단계
여러 개의 비차별화 사업들이 하나의 단일화된 지휘체계에 소속되게 하면 표준화 프로세스를 통해 추가적으로 자원을 확보해 낼 수 있다. 예컨대 유사 제품군으로 통합하고 다양한 밸류체인(Value Chain)을 표준화함으로써 전체적인 효율성을 높이고 투입되는 자원을 줄여 나가는 단계이다.
3. 모듈화(Modularize) 단계
부품 레벨까지 전체적인 프로세스를 리엔지니어링해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단계이다. 특히 이 단계에서는 현재의 프로세스를 극대화하는 내부적 시각 뿐만 아니라 외부의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들을 잘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주로 이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컨설턴트들과 함께 심플한 프로세스로 재구성하는 것이 좋다.
4. 최적화(Optimize) 단계
일단 특정한 프로세스가 모듈화되고 나면 이제는 최적화가 가능하다. 잉여업무들과 인원은 과감히 추출되어 재배치되고 모듈화된 프로세스는 자동화되고 간소화된다. 이 단계를 통해 업무의 복잡성과 리스크가 줄어듦에 따라 기존 작업에 투입된 인력을 상대적으로 덜 숙련된 인력으로 대체하면서 숙련된 인력들은 다른 곳으로 배치할 수 있게 된다.
5. 아웃소싱(Outsource) 단계
마지막으로 사업 또는 프로세스의 전략적인 가치를 꼼꼼히 따져본 후 과감히 전체 프로세스를 아웃소싱함으로써 고정비를 줄여나가고 추출된 자원을 혁신영역으로 재배치 해 나간다.
전략에 맞는 자원 배분은 CEO의 몫
제한된 사업역량을 가진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Top Player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고객관점에서 차별할 수 있는 분야로 자원을 재배치하여 선택한 전략 방향과 기업 자원을 일치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기업 입장에서는 모든 사업영역에 골고루 자원을 투자하기 어렵다. 따라서 미래 성장동력을 찾는 작업이 자칫 기존의 주력사업들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비차별화된 성숙기의 사업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기업이라면 적어도 신사업에 최적의 노력과 자원이 투입되지 못할 개연성이 많다.
현재의 자원으로 눈에 보이는 가장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시장은 이미 존재하는 시장이다. 하지만 미래의 혁신적인 성장동력을 찾으려면 기존 사업 프로세스의 기준으로 혁신적인 기회들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신사업이 기존사업의 시각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자율적 사업조직을 만들거나 신규사업부를 분사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러한 결정을 기업 시스템으로 할 수는 없다. 어떤 조직 시스템과 기업 문화도 전략 수립과 자원 배분 프로세스를 결정해 주지는 못한다. 혁신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그에 따라 과감하게 자원을 배분하는 일이야 말로 CEO가 집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전사적인 측면에서 자원의 흐름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유연한 흐름을 보이고 있는지, 미래의 기회들이 내부의 관성에 의해 사장되고 있지는 않은지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끝>
출처; LG경제연구원 주간경제884호
기업에 있어 실패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컨대 신사업에 관한 한 연구에 따르면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90%까지 기업이 추진하는 신사업은 실패한다고 한다. 아이디어 단계부터 보자면 삼천 가지의 신제품 아이디어 중에 오직 하나 정도가 시장에서 성공한다는 결과가 있을 정도다.
글로벌 기업이라 해서 실패가 비켜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끊임없는 혁신 활동을 추구하지만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실패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도전해서 실패하는 것과 실패의 기억에 사로잡혀 도전을 주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은 아무리 자금력이 좋고, 인재가 많은 회사라 하더라도 어느 순간 시장에서 도태되기 때문이다. 실패로 인해 투자자금을 잃는 것은 차라리 작은 문제다. 임직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기업 내부에 냉소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며, 미래에 도래할 변화에 저항하는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실패는 기업 역량을 좀먹는 덫이 될 수 있다.
흔히 성장이 정체되고 활력을 잃은 기업을 진단할 때 기업 내부의 혁신 프로세스, 또는 기업문화(Cultural infrastructure)를 이야기한다. 리더쉽의 부재, 적합하지 못한 조직구조,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및 비효율성, 권한이양(Empower-ment)의 부족, 잘못된 지식 관리(Knowledge Management)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흔히 지적되는 문제점들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고치려는 것은 식욕 부진을 보이는 암환자에게 소화제를 처방해 주는 것과 같다.
기업 문화나 조직 시스템 뒤에 도사린 근본적인 원인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더쉽의 부재보다, 잘못된 조직 구조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기업 내부에 존재하는 변화 거부증, 즉 관성(Inertia)이다. 관성의 늪에 빠진 기업들은 자기도 모르게 기존의 사업방식이 옳다고 믿어버리고, 사업 환경이 안 좋아지면 기존 사업방식의 근본적인 원인은 덮어놓은 채, 눈에 보이는 작은 비효율들만 고치려 애를 쓴다.
대기업은 체질적으로 비만 유전자가 있다
관성이란 정지하고 있던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 하고, 운동을 하는 물체는 계속해서 운동을 하려는 성질을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물체는 관성을 갖는다. 다만 물체의 질량에 따라 관성도 다르다. 물체의 질량(물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양)이 크면 클수록 관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업 규모에 따라 조직 관성의 정도도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벤처기업들은 경쟁자보다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새로운 전략을 잘 받아들이지만,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체계적인 시스템과 오랜 기간의 사업 경험을 축적하게 되면 기업 밖에 존재하는 시장과 고객보다는 과거의 경험, 조직에 널리 퍼진 관습들을 더 중요하고 익숙하게 여기게 된다.
소니(Sony)의 사례를 살펴보자.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이라고 하는 게임기 사업을 대성공으로 이끌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단순한 그래픽 처리기에 불과하던 기존의 2D 게임기에 컴퓨터 프로세서를 붙인 형식으로 고화질, 고기능의 기술 차별화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성공 체험은 소니의 이후 사업 전략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최근의 차세대 DVD 표준 경쟁에도 소니는 고화질, 고기능을 강조하는 동일한 전략으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소니는 헐리우드의 컨텐츠 제공 업체들과 독점 계약을 맺고, LG, 삼성 등의 우군을 계속 확보하면서 블루레이 디스크(Blue-ray Disc)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과거의 영화에 견줄만한 성과는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설사 경쟁표준인 HD DVD를 누르고 표준으로 채택된다고 하더라도, 디스크 기반의 저장매체 중심이던 컨텐츠 사업이 네트워크 통신기술 발달과 저장기기(HDD/메모리) 가격의 급격한 하락으로 인해 직접 전송이나 디지털 파일 저장 형태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블루레이 디스크는 경쟁 기술인 HD-DVD에 비해 기능도 좋고 빠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제는 이런 식의 기술 드라이브가 이젠 더 이상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고객의 입장에서 느끼는 성능 차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의 성공 체험에 빠져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차별화하기 어려운 성숙기 사업에 과잉 투자를 해 오버슈팅에 이르는 전형적 사례가 될 가능성도 있다.
관성의 진원지는 성숙기의 주력사업
그렇다면 대기업의 관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관성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얻은 경험일수록 사람들은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보통 이러한 경험은 사업 초기에 성공을 가져다 주지만 사업 환경이 변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히려 변화를 가로막는 장막이 될 수 있다.
대기업의 관성의 진원지는 오랜 시간 동안 성공을 거두었고, 그만큼 많은 경영진을 배출한 성숙기의 주력 사업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유형의 주력 사업들이 기업의 매출액 및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경영자들은 각별히 관성에 유의해야 한다.
도입 초기에 혁신적이었던 제품들도 시장이 성숙해 감에 따라 점차 범용화된다. 그러나 경영자들은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일 뿐,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인력, 자금과 같은 경영 자원들을 과거의 주력 사업에 집중 투입한다. 이러한 자원의 집중이 ‘관성’을 양산하는 주범이다.
성숙기 사업은 제품 속성상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상승 가능성 (Upside Potential: 차별화를 통한 시장 창출 및 확대)보다는 하락 위험(Downside Risk: 품질, 납기, 생산성 등의 기본적인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을 경우 발생하는 기회 손실)이 더 큰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사업이나 업무에 종사하는 관리자들의 위험 회피 성향은 점점 높아지며, 업무 프로세스도 점차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할 수 없는 구조로 변화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도전적인(Risk Taking) 관리자들보다는 위험 회피 성향의 관리자들의 수가 많아지므로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조직역량이 쇠퇴하게 되는 것이다.
관성을 양산하는 자원 배치 메커니즘이 문제
대부분의 기업들은 <그림 1>에서 보듯, 단기적으로 중요하되 경쟁사 대비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는 사업영역에 핵심 자원들이 묶어놓곤 한다. 이러한 사업들은 대부분 규모가 크고, 경영자의 성과 평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 부분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재고관리, 금융거래, 제품선적/판매 시스템, 회계기준, 고용계약, IT시스템 등의 보완이 순차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문제는 이처럼 증상 개선을 통해 나타난 결과를 핵심 경쟁력(Core Competency) 강화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오히려 위험회피적인 기업문화를 양산하게 되고 조직의 위기 의식을 떨어뜨린다.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이라는 근원적인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두꺼운 붕대로 감아놓기만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상처는 붕대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데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는 I과 II의 사업영역에 투입할 자원이 부족해지고, 기업의 미래 경쟁력은 점차 약화된다. 신사업이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지 못하거나 산업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사업 모델의 혁신이 지연되는 것은 이러한 메커니즘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매출규모와 이익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궁극적으로 관성을 고착화하고 양산해 나갈 수 밖에 없다. 이 영역의 제품들은 점차 고객입장에서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게 되고 오버슈팅하게 된다. 대부분 성숙기의 주력사업들은 경쟁사 대비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공격 당할 개연성이 있고 이 부분에만 집중할 경우 오히려 중장기적으로 매출이 줄어들 것이라는 위기 의식이 필요하다.
혁신의 흐름에 따른 자원재배치 프로세스
그렇다면 성숙 사업을 보유한 대기업들이 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혁신의 흐름에 따라 자원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는 혁신사업들에 항상 일정 정도의 안정된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이후 중점 육성 사업으로 선정되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기 위해 대량의 자원을 투입하되, 이후 성숙기의 주력사업으로 성장해 가면서 본격적으로 내부 합리화 프로세스를 거쳐 자원을 추출해 차별화 사업 쪽으로 재배치하면서 관성을 줄여 나가야 한다. 즉 자원(인력, 자금)의 이동이 비차별화 사업 및 프로세스로부터 차별화 사업 및 프로세스로 끊임없이 유연하게 일어날 때 혁신적인 문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영자들은 성숙기 사업영역에 묶여있는 자원들을 추출해 내기 위한 내부 프로세스를 개발해야 한다. 물론 기업 고유의 전략과 문화, 사업의 특성을 고려하여 단계별로 추진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이 적절하다. 예컨대, 당분간 사업의 외형을 유지시킬 만큼 성장한 중점육성 사업들이 없다면, 외형과 수익은 우선 유지하되 점차 체중을 줄여가는 자원 재배치 프로세스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무어(Moore)가 제시한 다섯 단계 모델(Five-Levers Model)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중앙집권화(Centralize) 단계
자원의 합리화 작업은 사업부 단위에서는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가 없다. 사업부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사업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일단 해당 사업이 차별화 단계를 넘어섰다는 판단이 서면 의사결정 구조를 중앙으로 집중화하는 프로세스를 통해서 이 부분에 묶여있는 관리비용(Overhead)과 인원들의 일부분을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2. 표준화(Standardize) 단계
여러 개의 비차별화 사업들이 하나의 단일화된 지휘체계에 소속되게 하면 표준화 프로세스를 통해 추가적으로 자원을 확보해 낼 수 있다. 예컨대 유사 제품군으로 통합하고 다양한 밸류체인(Value Chain)을 표준화함으로써 전체적인 효율성을 높이고 투입되는 자원을 줄여 나가는 단계이다.
3. 모듈화(Modularize) 단계
부품 레벨까지 전체적인 프로세스를 리엔지니어링해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단계이다. 특히 이 단계에서는 현재의 프로세스를 극대화하는 내부적 시각 뿐만 아니라 외부의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들을 잘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주로 이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컨설턴트들과 함께 심플한 프로세스로 재구성하는 것이 좋다.
4. 최적화(Optimize) 단계
일단 특정한 프로세스가 모듈화되고 나면 이제는 최적화가 가능하다. 잉여업무들과 인원은 과감히 추출되어 재배치되고 모듈화된 프로세스는 자동화되고 간소화된다. 이 단계를 통해 업무의 복잡성과 리스크가 줄어듦에 따라 기존 작업에 투입된 인력을 상대적으로 덜 숙련된 인력으로 대체하면서 숙련된 인력들은 다른 곳으로 배치할 수 있게 된다.
5. 아웃소싱(Outsource) 단계
마지막으로 사업 또는 프로세스의 전략적인 가치를 꼼꼼히 따져본 후 과감히 전체 프로세스를 아웃소싱함으로써 고정비를 줄여나가고 추출된 자원을 혁신영역으로 재배치 해 나간다.
전략에 맞는 자원 배분은 CEO의 몫
제한된 사업역량을 가진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Top Player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고객관점에서 차별할 수 있는 분야로 자원을 재배치하여 선택한 전략 방향과 기업 자원을 일치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기업 입장에서는 모든 사업영역에 골고루 자원을 투자하기 어렵다. 따라서 미래 성장동력을 찾는 작업이 자칫 기존의 주력사업들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비차별화된 성숙기의 사업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기업이라면 적어도 신사업에 최적의 노력과 자원이 투입되지 못할 개연성이 많다.
현재의 자원으로 눈에 보이는 가장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시장은 이미 존재하는 시장이다. 하지만 미래의 혁신적인 성장동력을 찾으려면 기존 사업 프로세스의 기준으로 혁신적인 기회들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신사업이 기존사업의 시각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자율적 사업조직을 만들거나 신규사업부를 분사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러한 결정을 기업 시스템으로 할 수는 없다. 어떤 조직 시스템과 기업 문화도 전략 수립과 자원 배분 프로세스를 결정해 주지는 못한다. 혁신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그에 따라 과감하게 자원을 배분하는 일이야 말로 CEO가 집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전사적인 측면에서 자원의 흐름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유연한 흐름을 보이고 있는지, 미래의 기회들이 내부의 관성에 의해 사장되고 있지는 않은지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끝>
출처; LG경제연구원 주간경제8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