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 성장통의 다섯 가지 징후 | | 손민선 | 2006.05.04 | 주간경제 883호 | | 글로벌 기업의 성장 추이를 살펴보면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성장이 정체되는, 이른바 성장통의 시기가 관찰된다. 급성장을 거듭한 한국기업도 조만간 성장통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성장통을 겪은 선진 기업의 사례를 참고삼아 성장통의 사전 징후를 포착해 본다. 성장기의 청소년들이 팔·다리·근육에 통증을 느끼는 것을 가리켜 성장통이라고 부른다. 뼈가 급속하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관절이나 근육이 뼈의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통증이다. 기업도 성장통을 겪는다. GE, IBM, 소니, 마쓰시다, 노키아, 모토롤라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글로벌 기업들의 성장 추이를 보면(<그림 1> 참조) 대부분의 기업이 짧게는 2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성장 정체를 겪었음을 볼 수 있다. 겉보기엔 모두 체계적 시스템과 역량을 갖춘 대기업인데, 이들이 성장통을 겪은 이유는 무엇일까?
‘기업 성장을 방해하는 10가지 증상’의 저자인 플램홀츠는 성장통을 기업 성장과 역량의 차이에 의해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기업의 성장이 거듭되면서 맞닥뜨리는 경쟁자의 수준도 높아지고, 제한된 시장에서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 변화는 기업이 가지고 있던 성장 기반을 무력화시킨다. 지금까지 핵심 역량으로 생각했던 것이 막상 경쟁자와 비교해보니 큰 차별화 요인이 되지 못하거나 지금까지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다른 역량의 격차가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주력 사업이나 시장이 포화되는 경우 신사업과 신시장의 발굴이 불가피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기업의 경우 조직 내 혼란이 가중되면서 장기적인 성장 정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조직보다는 전략이 문제
성장통은 흔히 대기업의 문제로 거론되는 대기업병과 비슷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문제의 초점은 다소 다르다.
대기업병의 증상으로는 비효율적인 보고 문화, 느린 의사결정, 보신주의의 팽배 등이 흔히 언급된다. 이처럼 대기업병은 대기업의 조직 특성, 즉 보수주의나 관료주의에 초점을 둔다. 반면 성장통은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전략의 실패에서 성장 정체의 원인을 찾는다. 조직과 전략이 맞물려 있는 한 대기업병과 성장통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성장 정체의 직접적인 원인을 찾는 것이라면 문제는 조금 달라진다. 실제로 일본식 대기업의 전형으로 잘 알려진 도요타는 보수적이고 완고한 기업 문화로 유명하다. 도요타 가문에 의한 소유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물론 도요타의 정경 유착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요타는 80년대 초 짧은 성장 정체를 겪은 것을 제외하면 30년 동안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림 1> 참조). 제품 변화가 빠르지 않고 품질과 기술이 중요한 자동차 사업에 도요타식 전략이 적중한 덕분이다.
대기업병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기업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기업은 대개 느리고 무겁다. 그러나 전략의 실패는 다른 문제다. 대기업이기 때문에 전략이 틀렸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대기업병을 이야기할 뿐 전략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이다. 개방적이고 빠른 조직을 만들고, 운영 상의 미숙을 개선하여 대기업병을 치유하는 것은 기업이 일상적으로 계속해야 할 활동이지만, 이것만으로 성장 정체를 해결할 수는 없다. 명확한 전략 방향의 설정, 사업 부문 및 역량에 대한 자원의 재배치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성장통은 극복되지 않는다. 성장통의 다섯 가지 징후
유감스럽게도, 성장통을 인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성장 정체라는 결과만 놓고 보면, 이것이 시장의 일시적 변화에서 오는 단기적 악재인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변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실적 악화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도 성장 정체가 해소되지 않는 단계에 가서야 뒤늦게 문제를 인식하고 대응책을 세운다. 그러나 성장통은 기업 전략의 근본적 변화는 물론 대규모의 구조조정까지 수반할 수도 있#는 난치병이다. 따라서 성장통의 징후를 사전 점검하여 성장통의 가능성을 초기 단계에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장통을 겪은 기업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문제들을 중심으로 성장통의 징후들을 찾아보자. ● 영양불균형 : 역량 별 자원 투입의 불균형
성장통에 걸린 기업을 보면 대개 어떤 역량에는 과다할 정도로 투자하지만 여타의 다른 역량에는 자원을 잘 투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선택과 집중, 즉 가장 자신 있고 중요한 역량을 설정하고 그것에 집중 투자하여 성장하는 방식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이 고도화된 시장에서는 한 가지 역량만으로는 성장을 지속하기 어렵다.
성장통에 빠진 기업은 기존의 핵심 역량을 확장시키기 보다는 기존의 핵심 역량에만 투자를 계속한다. 자사의 역량을 제대로 분석하기 보다는 경쟁사의 역량과 양적으로 비교하기 때문이다. 격차가 큰 부분에 자원을 투입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기업들은 비교적 격차가 작아보이는 과거의 핵심 역량에 투자를 지속한다. 그러나 아무리 한 역량이 뛰어나도 다른 역량이 부족하면 의도한 결과가 나지 않는 것이 다반사다. 그래서 성장통을 겪는 기업을 보면 핵심 역량의 효율성 지표는 점차 악화되고 대신 다른 역량에 투입되는 자원은 부족해진다.
90년대 성장 정체를 겪었던 마쓰시다는 제품 개발을 주도하는 R&D와 제품을 판매하는 영업 기능을 중심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마케팅 부서는 늘 뒷전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경쟁사인 소니에 밀려 매출액이 점차 정체되기 시작하자 R&D 투자와 영업 투자를 더욱 늘렸다. 이러한 재원은 광고 선전비 투자를 줄이는 것으로 충당되었는데 이로 인해 제품 브랜드 및 고객 커뮤니케이션을 약화시켜 매출이 부진해지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 관절염 : 조직 간 협업의 실패
역량 간의 불균형 성장은 필연적으로 기업 프로세스 상의 병목 현상을 야기한다. 기능 부서 각각은 최선을 다하지만 서로 협업을 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갈등이 생기면서 기업 전체의 성과가 악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제품 개발 부서는 마케팅 부서가 제품을 잘 팔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마케팅 부서는 제품 자체의 경쟁력이 없다는 식으로 서로를 비난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뼈와 뼈를 이어주는 관절에 탈이 생긴 관절염의 증상과 유사하다.
소니의 경우 마케팅과 R&D, 생산 조직을 모두 분리하여 기능별 최적화를 추구했으나 생산은 R&D가 개발한 제품을 제대로 생산하지 못했고, 마케팅과 협업이 부족한 R&D가 개발한 제품은 시장 경쟁력이 부족했다. 프로세스 상의 병목 현상과 협업 부족이 소니의 성장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사업 조직 간의 이기주의도 빈발한다. 사업부 자율과 내부 경쟁을 통해 성장을 도모하던 시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시장을 공략할 만한 틈새가 점점 작아지면 각각의 사업부가 같은 시장이나 제품을 공략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모토롤라의 신임 CEO인 에드 잔더는 부임 하자마자 모토롤라의 조직 이기주의를 기업 전체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원인으로 지적했다. 자기 사업에만 열중한 사업부장들은 다른 사업부의 어려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사업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는 기능 부서에 대해서는 과도한 간섭과 불만을 늘어놓기 바빴다고 한다. ● 사고 장애: 전략 부서의 기능 마비
성장통에 걸린 기업들의 경우 전략 부서가 제 기능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안 과제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현장의 문제에 경영진이 개입 하다 보면 CEO의 스탭 역할을 하는 전략 부서가 현황 파악에 나서게 되는데 이들이 문제의 현황과 원인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데까지만도 오랜 시일이 소요된다. 그러나 현장의 문제들은 보통 단시간 내에 결론을 내리고 해결 방안을 세워야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정작 대안은 수면 위의 현상만 해결하는 미봉책이 나오게 된다. 결국 유사한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고 현안 과제들은 계속해서 밀려든다.
이러다 보면 미래의 문제나 근원적 전략에 대해 논의할 시간이 부족할 뿐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허황된 것처럼 느껴진다. 전략 부서의 본업인 전략 수립은 형식화 되어, 시장 상황과 자사에 가능한 전략 대안을 검토하기 보다는 경쟁사 전략의 외형만을 분석하고 모방한다. 그러나 역량 기반이 다른 상황에서 경쟁사를 모방한 전략이 통할 리 만무하다.
● 시력 감퇴: 시장 및 고객에 대한 예측력 약화
현안 이슈 해결에만 집중하다 보면 시장과 고객에 대한 통찰력도 사라지게 된다. 또한 과거 경험에 집착하는 경영진이 시장의 변화를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이들은 시장과 동떨어진 전략을 수립하고 성과는 악화된다. 만약 경영진의 시장 예측이 자주 빗나가고, 객관적 데이터를 담은 시장 분석 보고서가 경영진의 주관에 의해 자주 수정된다면 성장통의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모토롤라는 휴대폰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키아에 시장 선두 지위를 내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모토롤라의 경영진은 단말 사업의 변화를 결정짓는 것은 통신 사업자이며, 휴대폰은 결국 통신 사업을 지원하는 부수 제품의 성격을 갖는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때문에 모토롤라는 음성 통화 기능에 집중하고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통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저가의 단말기를 만드는 것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기능이 하나의 기기에 담기는 디지털 컨버전스가 시장 변화를 주도할 것이라는 기업 내외부의 주장이 계속되었지만 모토롤라의 경영진은 이를 무시했고 2000년대 초반 들어 계속되는 성장 정체에 시달려야 했다. ● 무기력증 : 현 사업에 안주
성장통에 빠진 기업은 산업이 쇠퇴하면서 같이 소멸해버린다. 이것은 단명하는 기업의 특징이기도 하다. 기업이 계속해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담보할 만한 신사업들이 꾸준히 육성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기업은 성장통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마쓰시다의 경우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과 유사한 3D 게임기 시장에 진입하였으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이러한 실패에 겁먹은 경영진은 신사업보다는 현사업을 잘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고, 사업 조직들도 신사업에 따르는 리스크를 지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성장통에 빠진 조직은 첫번째 실패의 기억에 사로잡혀 두번째 도전을 꺼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기업 성장을 위협하는 중요한 경고 요소 중 하나이다. 한국 기업, 성장통 경계해야
글로벌 기업의 성장 정체 시기를 살펴보면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300~400억불, 600~700억불 사이에서 성장 정체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다. 기업의 크기는 기업의 성장 단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기업의 성장 단계를 크게 구분해 보면 작은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벤처 단계, 핵심 역량을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하여 성장하는 중견 기업 단계, 전 분야에 걸친 탁월한 역량으로 업계 지위를 공고히 하는 전문 기업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400억불과 700억불은 기업의 성장 단계가 달라지는 변곡점에 해당하는 매출 규모라고 판단된다. 물론 기업이 위치한 시장과 산업의 규모에 따라 성장통이 발생하는 지점은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내수시장이 일본과 미국에 비해 협소한 한국 기업은 이 시기가 조금 앞당겨 질 수도 있다.
삼성과 LG, 현대자동차 등 글로벌 사업을 전개하는 국내 기업들의 매출액 역시 이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성장 정체가 가시화된 기업은 없지만 한국 기업의 신사업 추진이 감소하고 있고, 새롭고 창의적인 성장 전략이 부재하다는 문제의식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성장통의 징후와 유사한 문제들이 기업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지 않은지 세심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R&D 역량을 핵심으로 빠른 성장을 이루었지만 디자인이나 품질, 원가 구조와 같은 근본적 역량 측면에서 선진 기업과 격차가 아직도 큰 것이 사실이다. 최근 들어 환율이나 원자재 환경이 계속 악화되고 있으며, 선진 기업의 역공세가 강화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성장통 발생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성장통 극복의 열쇠
그렇다면, 성장통을 딛고 재성장의 전기에 접어들기 위해 글로벌 기업들은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원의 재분배를 통한 신제품 출시, 신시장 및 신사업 추구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주간경제 828호, ‘성장의 벽을 돌파하라’ 참조). 다시 말하면 조직의 구심점과 전략의 방향성을 재설정한 것이다. 이것은 특히 성공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자신감을 확보했다는 데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장통을 극복 혹은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첫째, 내부 역량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그 동안 투자가 소홀했던 역량에 대한 자원 투자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마쓰시다의 경우 부족했던 마케팅 부문의 권한과 역량을 대폭 강화하고 상품 기획에서 개발, 생산에 이르는 모든 가치 사슬을 마케팅 중심으로 재편함으로써 성장정체의 악순환은 벗어날 수 있었다. 둘째, 성장 모멘텀이 될 수 있는 전사적 이벤트가 필요하다. 마쓰시다와 모토로라는 각각 V 프로젝트와 1000일 작전이라는 전사적 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GE와 IBM은 서비스 사업 분야의 신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성장 모멘텀을 잡을 수 있었다. 셋째, 성공 체험의 전사적 공유가 필요하다. 성장통을 겪는 기업은 대개 패배주의가 극도로 만연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성장이 없었으면 성장통도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힘들게 성장을 일궈온 경영진과 조직원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의 역량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확신을 조직 전반으로 확산시킬 때 비로소 성장엔진이 재가동 될 수 있을 것이다. <끝>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