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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삶의 진실성과 역사 인식(초당 신봉승)

by 홍반장 2007. 4. 15.
 

삶의 진실성과 역사 인식(초당 신봉승)



나라에 정도(正道)가 서 있을 때 녹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나라에 정도가 서 있지 않을 때 녹을 받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 공자(孔子) -


삶과 역사


우리가 역사를 화제로 삼을 때면 누구라 할 것 없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연상하게 되지만, 막상 사마천의 사기에 대하여 소상히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를 않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사기}보다 3백여 년이나 앞서 기술된 그리스의 사가(史家)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歷史)}에 대해서 소상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당연하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에서 거론한 두 저술은 그 내용이 방대하여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지만, 그것을 기술하게된 동기에 관해서는 한 번쯤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게 된 동기를 스스로, 나는 궁형(宮刑·남자의 상징물을 제거하는 형벌)에 항거하여 이 책을 쓴다라고 피력하였다. 남자의 상징물을 강제로 제거당한다면 그보다 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당시의 절대권력(武帝)에 의해 거세형을 당했기에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끓여야 했다. 마침내 그 분노가 사마천으로 하여금 역사를 기술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기술하면서, 신(神)은 인간의 오만에 대해서 보복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라고, 자신의 역사인식을 명확하게 밝혀놓고 있다.


신은 인간의 오만에 대하여 보복할 것이라는 헤로도토스의 신념은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사실로 입증되고 있지만, 아이러닉하게도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그런 유형을 체험하면서 살게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열전(列傳)의 분량이 많다는 사실은 그가 역사를 기술하면서 인간의 양식이 빚어내는 영광과 오만이 불러들이는 패망의 이치를 소중히 하였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며,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동서분쟁(東西紛爭)이라는 관점에서 클라이맥스라고 볼 수 있는 페르시아 전쟁이 주된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 또한 페르시아가 패망하게 된 원인을 크세록스의 오만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인도의 양심이며 인도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에서도 역사가 얼마나 준엄한 것인가를 찾아볼 수가 있다.

역사를 보면, 폭군이나 살인광(殺人狂)의 위정자도 있었다. 한때는 그들이 무적(無敵)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멸망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대사를 이끌었던 수 많은 위정자들은 이 같은 역사인식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었을까, 그런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도 민초들을 핍박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거나 연장을 기도하였다면, 그것이 바로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인간의 오만>일 것이며 또 신의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그의 신념이 얼마나 정확했던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천, 헤로도토스 그리고 간디의 삶을 떠 올리게 된다. 그들은 권부의 정상에 있지도 않았고, 어떤 세력의 핵심에 있지도 않았지만 세 사람 모두가 자신의 실익보다, 변천하는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는 세계사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호도되지 않은 역사인식과 만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역사의 왜곡과 훼손


역사를 잘못 읽으면 민족의 자긍심을 손상하게 되는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훼손하면 국민정서를 해치게 된다.


이 또한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 집안(家門)에는 그 집안 나름의 가통(家統)이라는 것이 전래되고 있다. 비근한 예로 30대에 백발이 성성해진다던가, 소주 한잔도 입에 대지 못하는 등의 특징을 [집안의 내력]이라고 말한다면 누구도 그것을 트집잡거나 나무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를 존중해 온 우리 민족의 정서가 내력을 함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동인(金東仁)의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우리의 국민적인 정서를 재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집안의 핏줄에 흐르는 가통을 가문의 내력(來歷)이라고 하듯, 국가나 민족의 가슴에 맥맥히 흐르는 내력을 역사라고 한다. 나라의 역사든 가문의 역사든 역사에는 반드시 영광스러운 부분과 수치스러운 부분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랑스러운 부분과 수치스러운 부분은 똑같은 무게의 사료적 가치를 지녔다는 사실에 특히 유념해야 한다. 우리가 접하는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부분이 자주 반복되는 것은 그 수치스러운 부분을 숨기거나 미화하려고 하는 파렴치에서 시작된다는 사실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역사는 비하될 수도 거부될 수도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꼭 같은 사로(史料), 혹은 역사로 평가되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으면, 버릴 것을 배우라! 라는 경구가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는 절대권력자의 때묻고 구겨진 곳을 가리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훼손한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쿠데타나 유신을 찬양하는 문장이 구국이라는 이름으로 교과서에 등재되기도 하였고, 정변이 정당화되어 또한 교과서에 오르는 일도 있었다. 이와같이 터무니 없고 경박하기까지한 역사 왜곡이나 국민정서의 훼손은 언제나 절대 권력으로부터 추진되었고, 놀랍게도 학자들이 거기에 동조했다는 사실은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그들은 불행하게도 그것을 강요한 권력의 주체가 무적이라는 것을 믿었지만, 결국은 멸망했다는 간디의 명언을 실감하면서 자신들이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찬양한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동시에 자신이 쓴 글이 교과서에서 삭제되는 수치를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치심이 역사에 기록되어 앞으로 더 많은 세월동안 자신과 후손들에게 악몽으로 밀어닥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가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자랑스럽고 큰 문화 유산을 한 가지만 들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택한다.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세계의 어느 나라도 장장 5백년간의 왕조사(王朝史)를 편년체의 일기로 빠짐없이 적어서(1,866권·887책) 후손들에게 전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제나라의 역사를 훼손하면서까지 권력을 연장하고, 제나라의 역사를 비하하는 것으로 지식인의 대열에 설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면 그것은 수치스럽고 비극적인 일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 관찬사료(官撰史料)라하여 믿을 바가 못된다고 비방하며, 심지어 민초들의 삶을 적지 않았다 하여 가치 없는 기록으로 매도하는 얼뱅이 부류들이 대학의 교단에 서 있는 지경이지만, 모두가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보지 않은 데서 기인된 것이라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나는 그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수 많은 드라마를 집필한 바가 있는데, 악역(惡役)으로 그려지는 인물들의 후손들이 찾아와서 그 선조의 행적을 아예 빼주거나 순화해 줄 것을 조건으로 수천만원의 금품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하는가 하면, 때로는 시멘트바닥에 꿀어앉아 눈물로 애원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역사의 준엄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엄연한 현실을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의 답답했던 근대사가 드라마로 만들어 질 때 역사왜곡의 주역들이나 훼손에 협조한 사람들의 행적이 적라나하게 영상으로 옮겨질 것이며, 교과서에 등재되었다가 삭제된 문장은 그 전문이 다시 살아나면서 이미 세상을 떠났을 당사자의 명성은 고사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 그들의 후손들에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수치심에 시달리게 할 것임은 불문가지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역사와 현실인식


올해는 광복 50주년이되는 뜻깊은 해이고, 명성황후(明成皇后·민비)가 일본인 낭인들에게 시해된지 1백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며, 또 한일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위와같은 역사적인 시츄에이션들이 기억에 되살아나고, 그 시츄에이션의 진상을 다시 분석하고 살펴보게 되는 까닭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역사는 죽어 있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맥락이다.

그렇다. 이를 부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특히 올해와 같이 이벤트가 많은 해에 우리의 역사 인식을 정밀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오늘에 이르는 50년 세월동안 우리가 가장 소리높혀 외친 말은 [일제 36년]이라는 원한에 찬 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치욕의 36년보다 더 긴 세월을 주권국가의 국민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민지사관(植民地史觀) 하나 불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간에 있었던 우리들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때묻고 구겨져 있었으며, 얼마나 큰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아직도 상당한 지위에 있는 지도급 인사들은 [조선왕조]라는말대신 [이조(李朝)]라는 비속어를 쓰고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조선백자(朝鮮白磁)]라고 써야 할 자리에 [이조백자]라고 쓰고 있는 무지와 만나게 된다. 심지어 일간신문의 중간 제목까지 그렇게 쓰여지고 있다면 어찌되는가.


더욱 놀라운 것은 1945년 이후에 출생한, 이른바 해방세대들까지 그런 말들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현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역사인식이 병들어 있는 기성세대의 전도된 가치관으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의 지도력 또한 한심한 지경에 있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식민지로 지배당했던 치욕의 36년 보다 더 긴 세월을 주권국가의 국민으로 살면서 굴욕적이고도 수치스러웠던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산물인 이른바 식민지사관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면 그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교육은 날로 더 뒤쪽으로 밀려나고 있으며, 다른 교과의 컬리큘럼도 우리의 정서보다 구미의 정서를 상위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교육환경이다. 바로 그러한 여건이 민족의 정통성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하였고, 스스로 민족의 자긍심을 훼손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지를 않았는가.

 

마치 굴욕과도 같은 이 현실을 깨부수지 못하고서는 결단코 말하거니와 세계화를 주장하는 지금의 현상은 그야말로 황당한 몽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비근한 예가 되겠지만, 우리의 근대사가 흥선대원군의 유아독존적인 아집 때문에 개항에 실패했다던가…, 같은 맥락으로 흥선대원군과 중전 민씨와의 끝없는 갈등과 대립으로 정치부재의 현상을 빚어내면서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는 등의 터무니 없는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과연 우리 민족의 미래를 창출해낼 수가 있을지…, 비감에 젖기보다 차리리 암담해질 때가 많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긍정적인 사관


혹자는 역사를 긍정적으로 볼 줄 알게 하는 것이 참된 역사교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처지는 있는 역사나마 제대로 알게 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인데도, 모든 집단들은 눈앞의 실익에만 매달리는 것을 능사로 삼았기에 정작 국민정서가 훼손되는 거대한 손실에 대해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죄악을 저질러 왔다.

 

가령, 세계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외국어에 능통해야 한다면서 자격을 갖추지도 않은 미국인 선생을 모셔오고, 그래서 유치원에 다니는 유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동안, 영이는 <스잔>으로 불리우고, 혜숙이는 <헬렌>, 철수를 <토니>라고 부른다는데 이게 어디 말이 되는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가치와 정서를 몸에 익혀야 할 가장 귀중한 시기에 헬렌, 스잔, 토니로 불리우는 유아들이 자라서 이 나라를 세계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이 땅의 교육계를 이끌어가는 장관이며 교수라면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의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근대사는 유홍기(劉鴻基), 오경석(吳慶錫), 이동인(李東仁) 등 개화 1세대의 선각자적인 열정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바가 있지만, 그들의 신분이 하나같이 중인(中人)이었던 까닭으로 다시말하면 백의정승으로 추앙받았던 유홍기는 의원(醫員)이었고, 오세창(吳世昌)의 아버지 오경석은 역관(譯官)이었으며, 조선인 최초로 일본땅에 밀항하여 당시 동경에 주재하고 있던 서양각국의 외교관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인 감각과 세계정세를 몸소 체험하고 귀국하였지만, 그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암살된 이동인 역시 새절(지금의 奉元寺)에 승적을 둔 승려(僧侶)의 신분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개항사상(開港思想)은 번져 나갈 수 있는 통로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 의해 뿌려진 개항사상이 꽃피어야 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개혁은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수구세력과의 갈등의 벽을 뛰어넘고서만이 성공할 수가 있다. 그 수구세력의 집단인 사대부가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위에서 언급한 선각자들에게 개화사상을 배웠던 김옥균(金玉筠),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등 개화 2세대의 불같은 결기와 참혹한 희생(甲申政變 등과 같은)으로 점철된 고난의 역정이 있었기에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과 같은 사상적인 변천을 꽃피우게 되는 것이며, 비록 외세의 힘이었지만 갑오경장(甲午更張)과 같은 개혁운동을 앞당길 수가 있었음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청소년들의 꿈으로 승화되어야 하기에 우리는 굳건한 역사인식을 날세워야 하는 것이다.


동방의 등불이여


역사는 청소년들에게 바로 인식되어야 하고, 꿈을 심어주는 거울이어야 한다. 선각자적인 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해서라도 우리 시대는 긍정적이며 진취적인 역사인식을 구축해야 한다.


21세기의 문명을 이끌어갈 10대 지도국 중에서 5개국이 극동지역에 위치하게 될 것이라고 세계의 석학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그 까닭은 이 지역에 찬란한 역사가 꽃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를 왜곡, 훼손하는 분위기가 끊임없이 팽배되고 국민정서를 호도하는 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장차의 일이 참으로 딱하고 걱정스러운 것이다.


나는 [역사를 관장하는 신(神)]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역사가 모든 인간의 삶을 가지런하게 하는 규범(規範)이라면, 우리의 역사에 우리의 모습이 담겨져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경우나, 집단의 진로를 정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의 진실, 다시 말하면 한국인의 정서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근대사는, 아니 지금의 현실은 이 엄연한 질서를 거부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 오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오만을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헤로도토스의 탁견에 다시한번 귀를 기울이고서야 우리의 밝은 미래를 점칠 수가 있을 것이다.

 

역사는 예언자의 구실도 한다. 그 예언은 이미 있었던 일과 그 결과를 기술하는 것이므로 진실성을 동반하게 된다. 그 진실성을 입증하는 한 편의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원고의 매듭을 짓고자 한다.


아시아 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바 있는 인도의 시인 타고르(R·Tagore : 1861-1941)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1929년에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에게 일제의 식민지하에서 신음하는 조선땅을 방문해 주기를 간청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를 민망하게 여긴 타고르는 한 편의 시를 써서 보내는 것으로 압제에 시달리는 조선의 민초들에게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오늘 우리가 그 시를 읽으면서 감동하게 되는 것은 시의 내용이 조선의 역사를 꿰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어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 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판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림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이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