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일본의 거품붕괴(1) - 금융완화로 본격화하는 버블경제
엔화 강세 저지를 위한 금융완화는 재할인금리(公定步合)의 전격적인 인하를 통해 추진됐다. 재할인금리는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 자금을 공급할 때 적용하는 대출금리로 이 금리가 낮을수록 은행들도 기업에 낮은 이자를 적용, 결국 기업들에게는 이자부담이 줄어들어 시중에는 자금 공급이 풍부해진다. 엔화 강세 불황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면서부터 일본정부는 일본은행을 통해 기업들이 자금사정에 위축되지 않게 시중자금의 양을 풍부하게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재할인금리의 인하는 86년 1월부터 시작돼 87년 2월까지 불과 1년 남짓 동안에 5차례나 단행됐다. 금리인하의 효과가 확인될 겨를도 없는 단기간에 재할인금리의 수준은 당초 5%에서 거품경제가 붕괴되기 전 당시로서는 과거 최저수준인 2.5%까지 떨어진다. 이와 함께 공공사업을 확대하는 재정정책도 추진되지만 대규모 재정정책이 본격적으로 확대된 시기는 이윽고 버블경제가 붕괴된 90년대다.
금리인하를 통해 자금공급을 대폭 늘리는 금융완화가 단행되자 은행에는 갈 곳을 찾지 못한 자금이 넘쳐흘렀다. 즉 당시 금융완화란 금리인하를 가리키는데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 대출할 때 적용하는 금리인 재할인금리를 2.5%까지 낮춤으로써 은행들은 대출 여력이 대폭 늘어난다. 금리가 높을 때는 이자 부담을 고려해 대출을 꺼려하던 기업들도 이자 부담이 뚝 떨어지자 설비투자 등 투자확대를 위해 대출을 늘리게 된다.
그러나 외환시장이 의도에서 벗어나 통제불능에 빠졌던 것처럼 금리인하 효과는 부동산 투기와 주식 열풍으로 이어졌다. 이자 부담이 낮은 만큼 돈을 빌려 땅과 주식을 사면 공장을 돌려 벌어들이는 이익보다 더 큰 수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금융완화에 의해 자금공급이 과다해진 것도 문제였지만 버블경제의 절정기였던 80년대 후반 일본의 대기업들은 금융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증시에서의 자금조달이라는 직접금융으로 눈을 돌린다.
주식이나 회사채 발행 등을 통한 직접금융이 시작된 것은 이미 80년대 초반부터였다.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필두로 한 일본기업의 수출강세는 일본기업들의 신용도를 크게 높였다. 그 결과 신용평가기관으로부터 최고신용등급(AAA)을 받는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완전무담보 전환사채(CB)를 발행하는 등 은행대출을 줄여 나가는 기업들이 도미노처럼 확산됐다. 그 결과 일본의 금융기관이 운용하던 자금량은 85년에서 90년에 이르는 불과 5년 사이 90%가 증가할 정도로 시중자금의 유동성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발로 찾아오는 기업들에게 대출하던 관행에 익숙해 있던 은행들은 남아도는 자금을 운용하기 위해 대출경쟁에 돌입한다. 일단 은행들은 대출 관행을 바꾼다. 이전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중소기업에서 대출처를 찾고 부동산담보를 통한 대출도 확대해 나갔다. 대출경쟁이 치열해진 나머지 담보물건을 보지 않고 대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은행간 경쟁은 물론이고 우물쭈물 대다가는 같은 은행의 다른 지점에 대출실적을 빼앗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당수 은행들은 심사기능을 영업부에 일원화시켜버리기도 했다.
일본 은행들의 심사기능이 처음부터 엉터리였던 것은 아니다. 일본경제는 자동차와 가전제품 등 제조업에 의해 견인됐기 때문에 은행들도 제조업에 관해서는 심사능력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동차 한대를 팔면 얼마만큼의 순이익이 나오며, 대출을 통해 얼마만큼의 이자를 받을 수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자금을 부동산이나 유통업에 빌려 주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부동산이나 유통업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빌려 간 기업이 어떻게 이익을 내는 지, 자금은 순조롭게 회수될 수 있는 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대출을 늘려 나갔기 때문이다. 부동산 관련업은 물론이고 유통의 경우도 결국은 쇼핑센터나 백화점을 짓기 위해서는 토지가 필요했고, 토지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었다.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화점과 쇼핑센터가 역세권을 중심으로 잘 발달돼 있는 것도 상당 부분 버블 경제시기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버블경제가 붕괴되고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담보로 잡아 뒀던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소비부진이 이어지면서 유통업은 연쇄적으로 도산하게 됐다. 그 결과 은행들은 부실채권을 떠앉게 됐고, 이것은 부동산이나 유통업에 대한 심사능력도 없이 무리하게 대출한 결과다.
치열한 대출 경쟁을 벌였던 후지은행과 스미토모은행의 대출관행을 통해서도 이런 상황은 엿보인다. 당시 본점 소재지에 따른 것이지만 일본에는 동 후지, 서 스미토모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두 은행은 경쟁은 치열했다. 후지는 도쿄에 본점이, 스미토모는 오사카에 있었다. 당시 스미토모와 업계 2, 3위를 다투고 있던 후지은행은 89년 9월 그림담보대출을 도입, 피카소의 그림을 받고 대출해줄 정도였으니 말이다.
맥주를 급하게 따르면 액체는 얼마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거품만 생겨 나중에 실질적인 맥주는 반잔도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경제는 전반적으로 거품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90년대 들어 일본 경제회복의 최대 걸림돌로 떠오른 부실채권의 문제가 잉태된다. 이들 은행은 이후 부실채권의 덫에 걸려 허덕이지만, 당시 업계4위이면서 까다로운 대출심사를 유지했던 미쓰비시은행은 상대적으로 부실채권 부담이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은행들은 이것도 부족해 80년대 후반부터 예금 기능은 없고 대출 기능만 갖고 있는 금융계열사들을 차린 뒤 이들에게 대출한 뒤 부동산담보를 통해 대출잔고를 확대해간다. 은행은 대장성의 감시 하에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은행의 정기검사를 통해 대출의 적정성을 심사받지만 자회사는 감독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90년대 들어 버블경제가 무너지면서 주식은 물론 부동산 가격도 일제히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부동산을 담보로 과도하게 대출해온 은행에는 부실채권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계속) (김동호/중앙일보 2005.6.13)